얼마 전 한국전쟁에 참전해 훈장을 받았더라도 탈영 이력이 있다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있었습니다. 언론 보도를 보면, 가족들은 탈영 기록이 잘못 기재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며 현충원 안장을 요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장 심사 측은 국립묘지 안장 부적격 사유에 해당한다며 거절했는데,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탈영’은 범죄이자 불명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전쟁 시기와 이후 50, 60년대에 병사들의 탈영은 일상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징병제가 공고해지기 전이라 병사들의 '도망'에 대한 나름의 허용이 있었던 것이죠. 징병제가 뿌리 깊이 내린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상을 참작했다면 법원의 판결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도망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청룡부대 소속으로 월남에 간 해병대 출신 참전군인은 당시 해병대 훈련이 어려워 도망가는 이들이 수두룩했다고 기억합니다. 함께 입대한 이들이 거진 다 도망갔고, 그 때문에 해병대에 철조망이 생겼다는 말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참전군인은 청룡여단 전체 차출로 전쟁에 가게 되니, 아버지가 인천 사는 이모네로 도망하라며 눈물로 쓴 편지를 받고 하룻밤 부모님을 만나러 간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이번 공론장 주제는 병사들의 ‘도망’입니다. 도시샤대학 사회학연구과 박사과정 모리타 가즈키(森田和樹)를 초대해 1950년대 탈영의 추세와 한국 정부 대응, 탈영병의 삶을 살펴보고, 1971년 국방부가 발행한 『전우신문』에 게재된 탈영병 7명의 수기를 통해 ‘탈영’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되는지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탈영병의 존재는 군간부들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파악되기도 하고, 정권에 대한 비판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탈영은 계급적으로 가난한 도시 하층노동자, 농민, 혹은 그들의 자식들처럼 징병율이 높은 이들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전쟁과 군대, 징병제도 이면에 탈영과 병역기피, 혹은 병역거부가 있습니다.
아카이브평화기억 연속강연 두 번째 시간, <병사들의 도망, ‘탈영’의 정치성과 저항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